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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뮤직 장르들을 모조리 ‘EDM’이라고 부르는 짓을 제발 그만둘 수 없을까?

댄스 뮤직 장르들을 모조리 ‘EDM’이라고 부르는 짓을 제발 그만둘 수 없을까?

디제이맥 디지털 에디터, 샬롯 루시 시즈퍼스가 EDM이 인기를 끌게 된 과정을 알아보고, 댄스 뮤직 씬 내 가장 의견이 분분한 논쟁을 해결해보고자 했다.

5년 전쯤 어느 미디어 만찬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다. 나보다 연배가 있는 암스테르담 출신과 뉴욕 출신의 국제적인 저널리스트들 사이에 상당히 불편하게 끼어 있었다. 댄스 뮤직과 요가를 접목한 페스티벌이 이듬해 여름 태국에 진출한다는 슬라이드를 보며 앉아 있는데, 뉴욕 출신의 저널리스트가 “현재 선호하는 EDM 디제이가 칼 콕스(Carl Cox)기 때문에 그가 플레이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저널리스트와 나는 너무 놀라서 헉 소리를 냈고, 해당 발언을 들은 주변 사람들도 무척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칼 콕스와 EDM? 당신이 착각했겠죠.” 암스테르담 출신의 저널리스트가 더듬으며 말을 이었고, 행사 장소의 커다란 LED 스크린에는 페스티벌 고어들이 웃으면서 스무디를 마시는 장면이 담긴 슬라이드가 지나갔다. 남은 프레젠테이션 시간 동안 뜨거운 논쟁이 테이블 위를 오갔고, 그 동안 나는 해당 저널리스트의 말은 고사하고 도대체 어떻게 칼 콕스와 EDM이 한 문장 안에 들어가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후 엘더플라워 칵테일 일곱 잔을 마시고 나서도 뉴욕 출신의 저널리스트는 여전히 EDM이 ‘Electronic Dance Music’의 약자이며, 따라서 테크노, 브레이크비트, 시카고 하우스, 정글 등 모든 기계 음악 장르를 포괄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암스테르담 출신의 저널리스트는 EDM이란 용어는 미국의 무지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디제이맥은 영국 잡지니까 알겠지만”이라 말했고, 나는 미니 키쉬에 정신이 팔린 척 했다. “유럽에서는 EDM을 댄스 뮤직의 서브 장르로 분류해요. EDM은 디즈니 채널에서나 나올 법한 마틴 게릭스 빅 룸 쓰레기지요!”

그 다음 내가 기억하는 건 둘 중 한 사람이 빠르게 날아오는 미니 키쉬에 얼굴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 이슈로 욱하는 걸 그날 처음 본 것도 아니었고 분명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EDM의 의미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코멘트들이 디제이맥 소셜 채널에 올라왔고, 나는 그것들을 중간에서 조절해왔다. EDM 논쟁만큼 격렬하게 독을 토해내는 주제도 드물다. 그러므로 이번에야말로 EDM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파헤쳐보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논쟁을 마무리 지어보자. 이것은 장르를 아우르는 용어인가, 아니면 특정 사운드, 그러니까 “디즈니 채널”에나 어울리는 댄스 음악을 지칭하는가.

 


디제이맥 페이스북 페이지 스크린샷/ 2018년 3월 11일

 

커뮤니티를 둘로 쪼개는 혼란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아주, 아주 멀리 2002년 초반으로 가야 한다. 그 당시 미국 아이들 대부분은 비어퐁을 하며 빨간 플라스틱 컵을 비우기 바빴고, 영화관에 떼로 몰려가 프랫 하우스에 대한 영화를 봤다. (<엽기 캠퍼스(Van Wilder)> 보러 갈 사람?)

음악적으로는 힙합이 대세였다. 에미넴이 1위 곡 ‘Without Me’에서 그 유명한 “아무도 테크노를 듣지 않아(Nobody listens to techno)”라는 말을 내뱉은 것도 그때였다. 그의 앨범 <The Eminem Show>는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됐고, 싱글 중에선 니클백의 ‘How You Remind Me’가 가장 많이 팔렸다. 영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넌 키팅이 무미건조한 발라드로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슈가베이브스나 아토믹 키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그룹들이 쫄쫄이 의상을 입고 오토튠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2002년의 미국과 영국은 중요한 한 가지 점에서 달랐다. 미국에선 에미넴의 말이 말 그대로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아무도 테크노를 듣지 않았고 그 어느 곳에서도 오늘날의 테크노 리스너들 숫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미국 음악 청취자들은 하우스와 테크노를 쫓아내버리고 2000년대 초반 떠오르던 (그리고 몰락하던) 트랜스 흐름을 따라갔다.

하우스와 테크노가 각각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에서 탄생한 점을 고려하면 역설적이다. 2000년대 초에 하우스와 테크노는 두 도시에서 더욱 언더그라운드로 밀려났다. 리치 호틴, 케빈 손더슨, 스테이시 풀렌 같은 아티스트들이 더 큰 공연과 폭 넓은 인정을 찾아 유럽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2001년엔 레이브 연방법이 도입되는데, 이 법에 의해 레이브가 전국적으로 공식 규제됐고, 전설적인 뉴 올리언스 프로모터 디스코 도니가 감옥에 가게 되는 그 유명한 사건도 터졌다.

 

에미넴의 ‘The Eminem Show’의 앨범 아트워크

 

2001년에 사샤와 존 딕위드가 트와일로 클럽의 레지던트를 그만둔 이후로 미국 내 트랜스와 프로그레시브의 인기는 다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럽 클럽들에선 여전히 이 장르가 대세였다. 한 예로 네덜란드 디제이 티에스토는 2002년, 2003년, 그리고 2004년에도 Top 100 DJs 1위에 올랐다. 그 후 왕관을 이어받은 이는 폴 반 딕과 아빈 반 뷰렌이었고, 아민은 2010년까지 1위를 유지했다. 미국 내 트랜스 인기가 다시 감지되기 시작한 건 2007년이었다. 그때 캐나다 출신의 젊은 프로듀서 데드마우스가 ‘Not Exactly’와 ‘Faxing Berlin’같은 트랙들로 “누 프로그(nu-prog)”를 개척했다. 이 장르를 가장 적절히 요약하면, 사샤와 존 딕위드가 몇 년 전에 밀고 나갔던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사운드를 깔끔하게 다시 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시에 댄스 뮤직의 인기가 오르락 내리락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선 댄스 뮤직에 대한 주류의 관심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30년 전에 디스코가 쇠락한 이래로 미국이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에릭 프리즈의 스케일 큰 디스코 샘플링 하우스인 ‘Call On Me’는 영국에선 1위를 거뒀지만 미국에선 빌보드 핫 댄스 차트 29위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거뒀다. 그보다 몇 해 전에, 다프트 펑크의 ‘One More Time’이 –십 년 후에 EDM 세대의 클래식이라고 재포장된 곡– 미국에서는 61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반면 영국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2000년대 내내 영국에선 굵직한 하우스 곡들이 배출됐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디펙티드 레이블의 소울풀한 음악들, 마일로의 ‘Drop The Pressure’ 같은 곡들이 주류 차트에 올랐다.

그러므로 매우 분명한 것은 미국과 영국이 적어도 2000년대 중반 댄스 뮤직에 한해서는 공통점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두 이질적인 씬 덕분에 댄스 음악이 다시 한 번 미국을 뚫는 데 성공하고 최소한 하나의 장르로서의 EDM이 미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장차 다가올 EDM 무브먼트의 영웅들과 달리, 사실 미국인의 고막에 EDM의 씨를 심은 것은 프랑스 듀오 저스티스였다. 확신하건대, 이 사실에 대해 그들은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 장르를 규정한 LP <†>는 미국에서 엄청나게 성공했고, 비슷한 사운드를 내는 프로듀서들에게 문을 열어줬다. 페이크 블러드(‘Mars’), 보이즈 노이즈(‘& Down’), 블러디 비트루츠(‘Warp’), 크루커스(‘Limonare’), 스티브 아오키와 그의 딤 막 크루가 그들이다. 저스티스의 <A Cross The Universe> 다큐멘터리는 (2008년 미국 투어를 따라다니며 촬영) 메탈과 댄스가 만난 그들의 음악이 그때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보여준다. 이 듀오는 피 터지는 주먹 싸움에 연루되고, 모쉬핏하는 관중들 위로 바디 서핑을 하고, 대기실에서 어린 여자들과 수상한 대화를 나눈다. 과격한 일렉트로 및 피젯 사운드는 호주의 클럽 키드들과 저스티스의 고향 프랑스 역시 열광시켰고, 덥스텝과 미니멀 씬이 붐을 이루던 2000년대 후반 영국으로도 유입됐다. 덥스텝은 미국에서도 (나중에 포스트 덥스텝도) 인기가 많아진다. 스크릴렉스 같은 신예들이 스크림, 디제이 핫차, 벵가 같은 영국 프로듀서들을 본보기로 음악을 만들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후 덥스텝은 지금 논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트랩과 같은 하위 장르로 갈라진다. 데이빗 게타 역시 EDM 폭발의 길을 닦은 중심축 역할을 했고 그의 공은 너무 커서 그의 이야기만 가지고 피처 기사를 만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게타는 거의 한 손으로 식은 죽 먹듯 댄스 퓨전 팝을 미국 차트에 올려놓았다.)

저스티스와 그 동료들의 사운드는 왜 그렇게 미국에서 많은 선택을 받았을까? 답은 단순하다. 그들의 음악이 적어도 미국 대중들에겐 매우 친숙했기 때문이다. 레이브라 부를 만한 댄스 뮤직(엑스터시에 취한 10대들이 털 부츠를 신고 고무 젖꼭지를 빠는 소름끼치는 광경)이 아니라, 옆에 그저 신시사이저 몇 개가 놓여 있는 록 쇼였다. 이 새롭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포맷은 힙합 팬들과(에미넴 팬) 록 팬들(니클백 팬) 모두가 받아 들일 만한 것이었고, 운 좋게 트렌드를 먼저 찾아내기만 하면 누구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럽에 걸쳐 그리고 현재 댄스록과 피젯 씬에 아울러, 앞으로 EDM에 거대한 영향을 줄 또 다른 스타일의 클럽 음악이 절정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더티 더치라 불리는 이 씬은 디제이/프로듀서 처키의 라디오 쇼와 레이블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그는 2000년대 중반 내내 네덜란드 전역에 걸쳐 스냅백 쓴 10대 무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거대한 킥 드럼과 반복적인 보컬 신스로 구성된 이 빅 룸 사운드는 1세대 EDM 프로듀서들 상당수에게 음악적인 영감을 줬고 미국에서 성공하도록 도왔다. 니키 로메로와 하드웰이 데뷔했을 때가 처키의 ‘Let The Bass Kick In’이 발표된 2008년이었다. 두 사람은 첫 번째 EDM 물결을 만들었고, 마틴 게릭스, 카이고, 덥스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피젯과 일렉트로 하우스가 EDM의 문을 열었다면,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는 이를 그야말로 제대로 휘어잡은 첫 그룹이었다. 그들은 이 장르의 진정한 첫 록 스타였다. 전용기, 슈퍼모델 여자친구, 비벌리 힐스 맨션을 소유했고, 과거에 헐리우드 유명 셀럽과 팝 스타들에게만 주어졌던 개런티를 받으며 슈퍼스타 노릇을 했다.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는 같은 스웨덴 출신 스타 故 아비치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클럽 트랙만 쓰고 프로듀싱한 게 아니었다. 라디오 방송과 펑션 원 스피커에서도 통하는 끝내주는 음악을 썼다.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의 미국 내 차트 성적은 유럽에서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위협적이지 않은 댄스 음악을, 정형화되고 따라 부르기 좋은 댄스 음악을, 페스티벌 관객과 12살짜리 여동생 모두가 좋아할 댄스 음악을 제시했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음악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센세이션 화이트 같은 트랜스 이벤트들이 큰 규모의 값비싼 프로덕션으로 명성이 높긴 했지만, 이제 디제이들은 스타디움 규모의 관객들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다만, 이 관객들은 중년의 남자가 그저 디제이 부스에 서 있는 걸 보기 위해 80 파운드를 지불할 의향이 없었다. 불꽃놀이와 시각적인 효과가 필요했고, 작은 헤드셋을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스테이지 매니저들이 필요했으며, 전용기, 라스 베가스 레지던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마쉬멜로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필요했다. 왜냐면 댄스 뮤직이 갑자기 하나의 쇼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로운 댄스 음악 팬들에게는 마틴 게릭스 같은 아티스트들의 음악만 소개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예산을 들인 고급스런 음악적 체험도 제공됐다. 마틴 게릭스, 아비치, 하드웰, 그리고 스티브 아오키의 케이크가 대표하는 것은 단지 트렌디한 음악 스타일이 아니었다. 막대한 자금을 가진 기업들이 뒷받침하는 새로운 쾌락주의적 현실도피였다. 몰리에 취해서 PLUR를 외치며 투모로우랜드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은 댄스 뮤직을 추종하는 새로운 방식이 됐다. 그리고 이 산업은 전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성장했다.

 

라스베이거스의 ‘Electric Daisy Carnival’

 

EDM은 단지 어떤 음악 스타일, 아티스트 그룹, 특정 사운드를 의미하지 않는다. 2010년대 댄스 음악의 빠르고, 수익성 좋고, 세계에 걸친 상업화를 일컫는 방식이다. 이것은 디제이들이 브랜드로 전환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그들은 복잡한 소셜 미디어 전략을 세우고, 이미지 컨설팅을 받으며, 하루 종일 경호를 받는다- 페스티벌이 집단적 대량 구매를 위한 소매 시장으로 전환된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지난 10년 동안 음악 시장은 음반에서 디지털로 전환됐고, 그로 인해 생긴 수익원의 빈자리는 아이들이 기꺼이 큰 돈을 쓰는 복합적인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머천다이즈, 티켓 그리고 VIP 테이블이 댄스 뮤직의 힘있는 기업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일렉트릭 데이지 카니발의 설립자인 파스콸레 로텔라가 그의 페스티벌을 “어른들의 디즈니랜드”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마틴 게릭스를 만났을 때 그는 2016년 TOP 100 DJs 투표에서 처음으로 우승한 뒤였다. 그는 왜 일부 EDM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들보다 EDM 거품 후에도 더욱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말했다. “요즘 싫은 건 다른 음악을 그저 카피한 음악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에요.” “모든 게 똑같이 들리면 싫어요… 난 뭔가 다른 걸 시도해보고 싶어요. EDM엔 비슷하게 들리는 음악이 너무 많지만, 내 레이블은 좀 더 다양하고 싶어요.”

당신이 마틴 게릭스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리고 그와 비슷한 다른 EDM 프로듀서들도 마찬가지) 이 친구가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웰-메이드 곡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중요한 것은 마틴 게릭스 세대의 프로듀서들은 투모로우랜드 메인 스테이지를 위한 뱅어를 만드는 동시에 집에서 밀레니얼 팝과 멈블 랩을 만든다는 것이며,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오가면서 프로듀싱을 하는 능력을 가진 프로듀서들이 기존 하우스 테크노 엘리트들보다 더 쉽게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EDM 흐름에 성공적으로 올라탄 디제이 및 프로듀서들과 관련해 진정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사운드 자체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 그것은 거대한 드랍과 캐치한 코드로 즉각적 희열을 선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좀 더 전통적인 댄스 장르들은 미묘한 오르내림을 가지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순수주의자들과 달리 EDM 아티스트들은 그들 사운드의 창시자나 기원에 집착하며 수 년의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왜냐면 장르로서의 EDM은 2010년 이전엔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좀 더 자유롭게 새로운 것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마틴 게릭스는 자신을 스타로 만든 ‘Animals’ 풍의 히트곡들에서 이미 한 발 물러났다. 지금은 ‘In The Name Of Love’와 ‘Scared To Be Lonely’ 같은 라디오 성향 퓨처 베이스 곡들을 뽑아내는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아마도 EDM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 데에 따른 계산된 변화일 것이다. 반면 아민 반 뷰렌은 트랜스에 계속 발을 담그면서 간혹 바이널 셋을 플레이해왔고, 티에스토는 최근에 딥 하우스 앨범을 발표했으며, 하드웰, 알레소를 비롯한 셀 수 없이 많은 EDM 아티스트들이 더 딥한 음악으로 서서히 전환할 목적으로 테크 하우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런 유형의 EDM 아티스트들이 향후 몇 년 뒤 어떻게 될지는 결국 그들이 얼마나 미래를 잘 예측하고 따라가느냐에 달렸다. 똑똑한 EDM 프로듀서들이 적극적으로 장르 밖 일반 팬층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다.

지난 해 디제이 맥 TOP 100 DJs 투표 결과만 봐도 언더그라운드 성향 아티스트들의 유입이 부쩍 늘었다.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팬들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세오 플렉스, 블랙 커피, 클랩톤, 솔로문이 모두 2017년에 처음으로 100위 안에 들었다. 몇 년 동안 차트에서 보이지 않던 앤디 씨, 폴 칼크브레너, 디스클로저, 리치 호틴도 모두 재진입했다.

 

울트라 뮤직 페스티벌 2016 칼콕스&프렌즈의 무대

 

팬들은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댄스 뮤직 분야에 최근 5년 넘게 종사해온 사람에게 EDM이란 용어는 디앤비, 테크노, 앰비언트, 딥 하우스 혹은 그와 관련된 어떠한 종류의 음악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음악 씬이 시장성 있는 상품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이며, 기업들이 마침내 우리 영역을 침범한 짧은 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EDM은 팝 펑크, 뉴 메탈, 혹은 이전에 등장한 모든 대중적으로 전용된 장르들처럼 이미 유효 기한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EDM은 제대로 그리고 진정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불씨마저 서서히 잊혀가고 있으며, 완전히 새롭고 잠재성이 훨씬 큰 트렌드에 길을 내주고 있다.

결국, 테크노가 새로운 EDM이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October 10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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